의회를 만들어낸 영국의 역사

영국의 역사

지도에선 마치 작은 섬 나라처럼 보이지만 유럽뿐만 아니라 전세계에서 알아주는 강대국 영국. 한때 일명 ‘해가지지 않는 나라’로 불렸던 영국은 아직까지도 해양 군사력이 미국 러시아 다음으로 세계에서 3번째로 강하다.

현재 영국은 국제법, 국제관계에서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스, 북아일랜드라는 총 4개의 독립적인 지역으로 구성된 연합국가로 간주된다. 그러나 월드컵 같은 스포츠 분야에서는 독립성을 인정해주어 스코틀랜드, 웨일스, 북아일랜드, 잉글랜드가 각각의 자격으로 국제 스포츠 대회에 참여한다. 한국으로 따지면 전라도와 경상도가 각각 월드컵 참가팀이 되는것이다.

지금도 다른 나라 연방과 달리 영국은 서로 나뉘어져 각자 정체성을 지켜나가려 노력한다. 영국의 역사는 서로가 서로를 견제하는 역사였다. 오랫동안 영국은 오늘날과 같은 땅 덩어리 안에서 각 지역끼리 수없이 다퉈왔고, 또 그 지역 안에서 조차 왕과 귀족, 평민들끼리 나뉘어져 티격태격 했다. 그리고 마침내 영국은 이러한 기질 덕에 다른 국가들에 비해 가장 빨리 ‘민주주의’가 발달했다.

선사시대부터 스스로 켈트(Celt)족 이라고 부르면서 유럽 대륙 전역에 분포되어 살고있던 민족이 기원전 8세기 경 부터 영국에 조금씩 유입되었다. 그리고 이들은 원래 영국 섬에 살고있던 원주민들을 몰아내고 영국 섬 전역을 장악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몸에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라는 뜻을 가진 켈트어 ‘프레타니’를 듣고 이들을 ‘프레타니케’라고 불렀으며, 로마는 브리튼(britain) 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것이 현재 영국을 British로 불리게 한 기원이다.

영국에 침투한 켈트족을 브리튼으로 부르던 로마는 율리우스 카이사르 때 대륙에 사는 켈트족에 대해선 ‘갈리아’라고 불렀다. 로마는 클라우디우스 황제때부터 춥고 자원도 별로없던 오늘날 스코틀랜드 지역을 제외한 대부분의 영국 섬을 장악·지배 하기 시작, 기원후 43년부터 410년까지 약 400년간 지배했다. 그리하여 그 기간동안 영국은 당시 유럽의 선진문물이었던 로마제국의 언어와 문명, 기술, 법체계를 도입할수 있다.

그런데 언제부터 그들을 앵글로색슨족이라고 부른걸까?

기원후 410년 이후 서로마 제국이 게르만 민족에 의해 멸망해 갔다. 그런데 이 게르만 민족은 단순한 하나의 민족이 아니었다. 게르만족은 앵글족, 색슨족, 주트족 등 다양한 민족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그중에서 앵글족과 색슨족이 점차 영국 섬의 모든 지역을 장악하면서 7개의 왕국을 세웠다. 이때 원래 영국섬에 살던 켈트족은 현재의 스코틀랜드, 웨일즈 지역으로 밀려나게 되었고, 앵글족과 색슨족이 차지한 땅은 현재의 잉글랜드가 되었다. 현재의 영국이 각각 다른 민족성과 다른 조상을 갖고 있다는건 이런 과거 때문이다.

웨섹스 가문 (잉글랜드 왕국) 부터 꼬인 계보

  • 에드워드 왕(1042~1066)
  • 해럴드 2세(1066~1066, 1월 즉위, 10월 폐위)
  • 윌리엄 공작(1066~1087)

927년부터 영국 섬 중부와 남부지역에 잉글랜드 왕국이 존재했고, 웨섹스(wessex) 가문이 지배했다. 그런데 에드워드와 달리 해럴드2세는 웨섹스 가문이 아니었고, 그 사실이 소문나자 여기저기서 자기가 왕이 되겠다고 나선다. 특히 현재 네덜란드 지역에 위치한 당시 노르망디공국의 ‘윌리엄 공작’이 잉글랜드 왕국의 왕이 되는데 웨섹스 가문이었던 에드워드가 생전에 윌리엄공작에게 충성을 맹세했기 때문이라는 주장 때문에 이를두고 잉글랜드 왕국의 귀족들은 반발하기 시작, 결국 잉글랜드 왕국과 노르망디 공국이 전쟁을 벌이게 된다.

결론적으로 윌리엄 공작이 승리, 이때부터 노르망디 가문이 잉글랜드를 지배하는 노르만 왕조가 시작되었다. 윌리엄 공작은 노르망디 공국의 지배방식인 ‘봉건제도’와 국가의 주요 인사들이 모여 정책에 대한 자문과 회의, 그리고 새로운 법률까지 제정하던 모임인 ‘위테나예모트’를 영국에 식립했다. 우리가 학창시절에 배웠던 ‘마그나카르타’의 씨앗이 심어진것이다.

1199년 부터 1216년까지 잉글랜드 왕국을 지배한 폭군 John은 폐급수준의 통치로 국민들에게서 외면당함은 물론 당시 프랑스 북부에 있던 영국의 영토까지 타국에게 대부분 빼앗겨 버렸다. 최근 尹 대통령 비상계엄 사태와 같이 이에 대하여 더 이상 참을수 없었던 영국의 귀족들과 백성들은 존 왕에게 63개의 조항이 담겨있는 요구서를 바치는데 그게 바로 ‘마그나카르타’다.

마그나카르타는 유럽 역사상 최초로 왕에 대한 견제를 명시한 문서였다. 이후 1258년 더욱 강력하게 왕의 권력을 제한하는 조항들이 담겨진 ‘옥스퍼드 조례’라는 개혁안이 탄생되었고, 1265년 영국 최초의 의회라고 불리는 ‘시몽 드 몽포르’ 의회가 소집된다.

각각 자신의 할아버지와 아버지인 존, 헨리3세를 거쳐 에드워드 1세가 1272년에 왕이 되었다. 그는 이전 왕들과 달리 귀족들을 만나 소통하고 타협했다. 의회를 소집하여 전쟁비용을 위한 세금부과를 허락해달라고 귀족들에게 요청했고, 성직자들의 입장도 고려해주었다. 역사는 이 시기가 현대사회에서 정기적으로 열리는 국회와 비슷한 형태가 자리잡았다고 평가하고 있다.

다만, 아직까지 왕과 귀족들을 위한 기구였다. 국민들의 지지를 받던 왕은 귀족들의 말을 들을 필요가 없었지만 인기가 없었을땐 귀족들의 눈치를 보며 몸을 사렸어야 했다. 1558년부터 1603년까지 통치했던 엘리자베스 1세는 당시 무적함대로 불리던 스페인 함댕와의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며 국가의 수호자이자 영웅이 되었다. 따라서 왕과 귀족들의 권력다툼이 크게 줄었다. 강력한 절대왕정 시대였다.

그런데 그 이후, 1625년 영국 왕이 된 찰스 1세는 왕권신수설을 주장하던 아버지 제임스 1세 때문에 종교전쟁으로 불리는 30년 전쟁을 하느라 국고가 바닥을 보이는 상황이었다. 찰스 1세는 예민해졌고 의회를 해산시켰다. 당연히 영국 의회는 찰스 1세를 죽어라 비판했고, 1628년 ‘권리청원’을 제출한다.

  • 그 누구도 함부로 체포하거나 구금할수 없다
  • 국민이 군법으로 재판 받아선 안된다
  • 군대가 민가에 강제로 투숙해선 안된다
  • 의회의 동의없이 강제 기북, 과세, 증여를 부과해선 안된다

내용을 보면 당시 귀족들이 본인들의 권력강화를 위해 ‘국민을 위한다’는 명분을 넣은 권리청원이었다. 종교전쟁으로 힘들때라 찰스 1세가 여기에 서명했지만 1629년 또 다시 의회를 해산시켜 버리고 이후 11년간 절대왕정 정치를 했다. 이후 1639년 영국 성공회 문제로 스코틀랜드 청교도인들이 반란을 일으킨다. 이른바 ‘주교 전쟁’.

주교전쟁과 명예혁명 이후

내전은 제대로 된 청교도 국가를 만들기 위해 찰스 1세가 아닌 귀족편에 서서 죽어라 싸운 올리버 크롬웰이라는 인물의 승리로 이어진다. 그리고 청교도 식의 종교국가로 만들기 위한 독재정치가 시작된다. 극장을 폐쇄하고 음주가무와 오락을 금지시켰다. 오로지 신만 바라보며 부지런하게 살아야 한다고 강요하자 영국 구민들은 지쳐갔다. 결국 1649년 크롬웰의 청교도식 통치에 불만을 품고 있던 스코틀랜드 지역에서 찰스 1세의 아들 찰스 2세를 왕으로 모신다고 발표, 게다가 1658년에 갑자기 크롬웰이 병으로 사망하면서 다시 권력 공백이 생긴다.

귀족들은 적어도 크롬웰보다 상대하기 편한, 국민들한테 인기 없는 찰스 2세를 데려와 왕으로 앉히길 바랬다. 그래야 의회에서 귀족들이 마음대로 정치질을 할수 있을것이라 판단했다. 그런데 찰스 2세는 왕이 되자마자 아버지를 처형했지만 귀족들 또한 싹 다 잡아 처벌하고 사형시켰다. 그렇게 또 의회와 왕이 갈등을 겪게 된다.

그러던 1685년 찰스 2세가 갑작스레 병으로 사망한다. 이후 찰스 2세의 동생 제임스 2세가 왕으로 추대되었으나 독실한 로마 카톨릭 신자로써 그를 경계한 귀족들에 의해 퇴위당하고 그의 딸 메리2세와 그녀의 남편 윌리엄 3세가 국왕으로 추대된다. 이 과정에서 의회 중심의 입헌군주제 토대를 마련했으나 사상자도 거의 나오지 않았으므로 이 사건을 ‘명예혁명’으로 자화자찬 해서 부른다.

이후 나폴레옹 전쟁으로 전 유럽에서 인플레이션이 발생, 식량이 부족해지고 곡물가격이 폭등했다. 그러나 나폴레옹 전쟁이 끝난 1815년 부터는 옥수수와 밀 가격이 쿼터당 126실링 → 65실링까지 급락했다. 그런데 영국 의회는 곡물법을 제정하여 곡물가격이 더 이상 폭락하지 않도록 보호무역을 하겠다고 밝혔다. 당시 영국 의회를 차지하는 대부분은 자본가들이었고, 곡물가격이 하락하여 이익을 볼 국민들에게는 필요없는 법이었다. 의회는 껍데기만 국민의 의견을 대변한다고 했지 실제로는 자본가를 대변하는 집단이었다.

민중들은 영국 국민에게 누구든 투표에 참여할수 있도록 참정권을 개선하라고 요구하기 시작, 1832년 선거법에 개정된다.

디에이치리뷰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