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시민의 나의 근현대사 [2편] 독후감

4차에 걸친 박정희의 경제개발 5개년

국가경제가 이륙하려면 활주로와 연료가 있어야 한다. 전통적 경제이론에 따르면 생산의 필수요소는 자본과 노동력이다. 대한민국에 노동력은 많았지만 자본은 아예 없는 상황이었다. 산업화를 위해선 공장건물, 기계, 원료와 중간재 같은 실물자본을 축적해야 한다. 이를 ‘자본의 원시적 축적’이라고 하는데 제국주의 서구 열강들은 군사력으로 다른 국가들을 정복해 노동력과 자원을 약탈함으로써 자본을 축적했다. 소련과 중국같은 현실의 사회주의 국가는 “다같이 잘먹고 잘살자”는 ‘혁명 이데올로기’를 동원해 생산수단의 소유권과 생산물의 처분에 관한 권한을 자본가가 아니라 공산당 관료들이 행사한 일종의 국가독점자본주의로써 자본을 쌓았다.

그런데 대한민국은 자본의 원시적 축적’을 위해 다른 나라를 수탈할 능력도 없었고, 이데올로기로 대중을 동원할수도 없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자본을 해외에서 차입하고 기업으로 하여금 폭리를 취하게 함으로써 자본의 원시적 축적을 이뤘다. 정부는 독점기업들이 시장지배력을 이용해 폭리를 얻도록 했으며 노동조합과 노동운동을 강력하게 탄압했다. 소비자와 노동자를 착취함으로써 기업들은 짧은 기간에 막대한 자본을 축적할수 있었다. 그러나 대한민국에서 진행된 ‘자본의 원시적 축적’이 특별히 비인간적이고 잔혹했던것은 아니다. 마르크스가 말한것처럼 어느곳에서나 자본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든 구멍에서 피와 오물을 흘리며 태어났다.

박정희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자본의 원시적 축적’ 즉 이륙을 위한 선행조건이었다. 1962년부터 1966년까지 진행된 제1차 5개년 계획의 핵심은 다음과 같은것이었다

  • 전력과 석탄 등 에너지원 확보
  • 국가기간산업 확충
  • 철도·도로·항만 등 사회간접자본 투자 확대
  • 농업 생산력 제고
  • 수출증대
  • 기술 진흥

1967년부터 1971년까지 제2차 5개년 계획의 목표는 1)식량자급, 2)삼림녹화, 3)화학·철강·기계공업 건설, 4)7억 달러 수출, 5)고용확대, 6)국민소득 증대, 7)과학기술 진흥, 8)기술수준과 생산성의 향상 등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핵심은 3번의 화학·철강·기계 등 중화학 공업 육성이었다. 그러나 중화학공업을 육성하려면 다른 어떤 산업보다 막대한 설비투자를 해야 했지만 투자에서 이윤획득까지 걸리는 시간은 매우 길었다. 당시 대한민국에는 축적된 자본이 없었으므로 밖에서 들여오는것 말고는 단기적 해결책이 없었다. 정부는 한일국교 정상화, 베트남전쟁 파병 등을 계기로 일본과 미국 자본을 들여와 중화학공업 건설작업에 시동을 걸었고 제3차 5개년 계획 기간에 가시적인 성과를 얻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73년 신년 기자회견에서 중화학공업화를 선언했다. 1980년대 초까지 수출 100억 달러와 1인당 국민 소득 1,000달러를 달성하고, 수출상품 중에서 중화학제품이 절반을 넘기게 하겠다고 장담했다. 첫 3년 동안 31억 달러의 투자자금을 동원하면서 이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전쟁을 일으키자는 것도 아니지 않으냐. 일본은 국가의 운명을 걸고 전쟁을 일으켰는데도 국민들은 기꺼이 따라주었다. 태평양전쟁 때 패전을 해서 국민들에게 막중한 피해를 주긴 했지만 이 정도의 사업에 협조를 안 해주어서야 되나?”

당시 국제 경제환경은 좋지 않았다. 베트남 전쟁을 치르느라 너무 많은 돈을 찍어낸탓에 달러가치가 폭락하자 금태환 제도를 전격 중단한 1971년 미국 닉슨쇼크, 이스라엘과 아랍연합군이 전쟁을 벌인 1973년 중동전쟁으로 인해 환율은 불안정하고 국제유가는 5배 이상 튀어올랐다.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은 그런 상황에서도 대규모 정부차관을 들여와 기업에 배분했다. 해외 국가채무규모가 급증하자 나라 안팎에서 ‘외채망국론’이 거세게 일어났지만 원유가격 폭등으로 천문학적인 ‘오일달러’를 거머쥔 중동국가들의 건설 붐을 적극 활용해 한국경제는 연평균 +10%에 육박하는 성장률을 기록했다.

1977~1981년의 제4차 5개년 계획 한복판에서 10·26 사건이 터졌다. 1979년 10월 26일 이후 12월 12일 군사반란,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을 발동한 일련의 과정속 전두환은 그 계획을 그대로 살려 나아갔지만 1982년에 시작한 제5차 5개년 계획부터는 국가주도형 자본주의적 계획경제를 점진적으로 해체했다. 목표에서 성장이 빠졌고 대신 자율, 경쟁, 개방, 국제화, 기업경쟁력 강화 같은 새로운 목표가 등장했다. 국내 대기업과 재벌들이 이미 거대한 부를 축적했기 때문에 정부가 투자재원을 조달해 기업에 할당할 필요도 없어졌다. 결국 1997년 외환위기와 함께 국가주도형 경제개발계획의 시대는 완전히 막을 내렸다.

1960~70년대 한국식 자본축적

경제성장은 국가의 부가 늘어나는것, 국민이 해마다 생산하고 소비하는 재화와 서비스의 양이 늘어나는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측정하기 위해 국민총생산, 국내총생산, 국민총소득 같은 지표를 쓴다.

국민총생산을 늘리는 방법은 4가지가 있다.

  • 더 많은 노동력을 생산에 투입 (인구가 늘거나 고용률을 높이거나)
  • 더 많은 자본을 생산에 투입
  • 생산기술 수준의 향상 (같은 양의 노동력과 자본으로도 더 많이 생산할수 있다)
  • ‘신뢰’라는 사회적자본 확산

1959년 대한민국에는 노동력만 있었고 자본, 생산기술, 사회적 자본이 없었다. 경제를 발전시키려면 누군가 리더십을 발휘하여 경제활동 참가를 독려하고 생산기술 수준의 향상에 대해 교육하며, 서로 믿고 물질적 자본을 형성하고 거래할수 있도록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앞서 언급한것처럼 산업화의 최우선 과제는 ‘자본의 원시적 축적’이었다. 그러나 국민들은 너무 가난해 저축할 여유가 없었고 국가 전체로도 생산이 소비를 충족하지 못해 외국의 원조를 받아야 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본의 원시적 축적을 도모했다. 1960년대에는 일제의 착취와 수탈과 학살에 대한 배상청구권을 3억 달러라는 헐값에 넘겨주었고 베트남 전쟁에 청년들을 보내 5,000여명을 희생시켰다. 독일에는 약 2만여명의 광부와 간호사들을 보냈다.

1970년대에는 중동지역이 외화 획득의 중요한 현장이었다. 1979년 중동지역에 파견된 한국 노동자 수는 10만명에 육박했다. 1973년 삼환기업의 사우디아라비아 도로 건설공사로 시작한 중동 건설붐은 남광토건, 신한기공, 대립산업의 요르단, 아랍에미레이트연합, 쿠웨이트 건설수주를 거쳐 1976년 현대건설의 사우디 항만공사로 폭발적 양상을 보였다.

이에 더해 정부는 일본인 관광객을 상대하는 소위 ‘기생관광’을 공공연하게 허용했다. 1965년 한일국교 정상화 이후로 일본인 관광객이 급증, 1973년 외국이 관광객 68만명 중 80%가 일본인이었다. 그리고 그 대부분이 기생관광을 즐기러 온 일본의 하위 소득계층 남자들이었다. 외화벌이를 한다면 안될 일이 없었다. 종로 10곳을 비롯해 서울에만 14곳, 부산에 7곳, 경주에 4곳, 제주도에 2곳의 관광요정이 있었다. 가장 규모가 컸던 삼청각, 대원각에는 ‘관광기생’ 수가 800명이나 되었으며, 여행사와 관광요정 그리고 호텔이 삼각동맹을 맺은 이 국제적 성매매사업은 1973년 한 해에만 2억 달러의 관광수입을 안겨준것으로 추정된다.

수출은 칭송해 마땅한 애국행위가 되었다. 정부는 산업보국이니 수출입국이니 하는 구호를 걸고 수출으 많이 한 기업과 기업인들에게 금탑, 은탑, 동탑, 철탑 산업훈장과 막대한 세제혜택을 주었따. 수출기억 경영자와 노동자들에게는 수출역군이나 산업전사 같은 명예로운 이름을 부여했다. 단, 이들이 지켜야 했던 가장 중요한 규범이 있었다. 외환관리법에 따라 수출대금을 관리하는 것이었다. 자금을 해외로 빼돌리는 것은 최악의 반사회적·반국가적 범죄로 간주했다.

이것은 자본의 원시적 축적과 생산능력 확대에 관한 이야기 이자 한국의 산업화에 대한 이야기다. 경제성장은 자전거를 타는것과 같아서 계속 페달을 밟고 달리지 않으면 쓰러진다. 성장이 멈추면 현상유지를 하는게 아니다. 성장속도가 둔화되기만 해도 경기가 급강하하며 때로 붕괴의 위기에 빠진다. 경제가 지속적으로 성장하려면 기업들이 늘어난 생산물량을 팔아 이윤을 남기고, 그 이윤을 다시 투자해 생산능력을 더 확장하며, 또 다시 늘어난 생산물을 팔아 더 큰 이윤을 얻을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1960~1970년대는 대한민국 국민소득 수준이 너무 낮아서 국내 소비만으로는 경제성장을 지탱할수 없었고 외채 원리금을 상환하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달러를 획득해야 했다. 결국 수입을 억제하고 수출을 장려하는것 말고 다른 길이 없었다.

그러나 원유를 비롯한 에너지와 원자재, 공작기계와 부품 등 생산설비와 중간재 수입은 막을수 없었다. 생산을 해야 수출을 할수 있기 때문에 생산을 위한 수입은 막아선 안되었다. 그러나 소비재 수입은 막아도 된다. 정부는 소비재에 높은 관세장벽과 비관세장벽을 쳤고 양담배와 외제차를 공공의 적으로 만들었다. 외제차를 타면 국세청이 자금 출처를 추적하고 특별 세무조사를 했다. 한국 경제 개방 초기였던 1980년대 중반 서울에 온 미국과 유럽의 자도차 회사 경영자들은 한국이 공산당보다 더하다고 혀를 찼다. 한국의 수입차 시장점유율이 거의 0%로 소련과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보다 낮았기 때문이다.

19세기 독일의 경제학자 프리드리히 리스트(Friedrich List, 1789~1846)는 고전적 자유주의가 풍미했던 19세기 중반에 “산업기반이 약한 독일이 자유무역을 하면 경제적으로 영국의 패권 아래 편입되어 별 볼일 없는 산업을 가진 2등 국가가 될 것”으로 전망했다. 그래서 먼저 높은 무역장벽을 치고 자국의 산업을 육성한 다음, 충분한 실력을 갖췄을때 국내시장을 개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한민국의 무역정책은 뒤늦게 산업화를 시작한 나라에는 보호무역주의자 리스트의 전략이 타당하다는 것을 입증했다.

새로운 지배세력으로 떠오른 재벌

한국경제는 시장경제체제가 아니었다. 시장의 원리에 따르면 자본은 저절로 수익성 높은 투자 프로젝트를 가진 산업과 기업으로 흘러들어 간다. 그런데 산업화 이전의 대한민국에는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자본시장과 금융시장이 존재하지 않았다. 외국이나 한국은행에서 돈을 빌려 만든 투자재원을 정부가 기업에 직접 나눠주었다. 그런데 정부의 실체는 박정희 대통령과 측근 참모들이었다. 아무리 수익성 있는 투자 프로젝트를 가진 사람이라도 정부에 줄을 대지 못하면 자금을 받을수 없었다. 특혜가 있는곳에는 정경유착과 부패가 생길수밖에 없다. 그렇게 해서 재벌체제가 탄생했다.

정부는 재벌 대기업이 수출을 해서 달러를 벌어들일수 있도록 자금과 세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대통령과 참모들의 신임을 받은 기업인들은 물가인상률보다 훨씬 낮은 이자를 내는 정책자금을 받았다. 각종 특혜와 행정 편의를 제공받으며 국내시장의 독과점 공급자가 되어 소비자인 국민을 착취한 재벌 총수들은 대통령과 권력실세들에게 ‘통치자금’ 명목의 뇌물을 넉넉하게 바쳤다. 삼성그룹 이병철, 현대그룹 정주영, 선경그룹 최종현 등 거대 기업집단을 만든 재벌 창업자들은 그런 일에 빼어난 능력을 발휘한 사람들이었다.

5·16 직후 박정희의 군사혁명정부는 재계 서열 10위권 기업인들을 모두 구속했으나 일본에 출장은 간 덕에 체포를 면한 삼성그룹 이병철 회장은 “5·16을 지지하며 부정축재자 처벌 방침에 이의가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한국전쟁 시기에 만든 불합리한 세법 아래에서 고용을 창출하고 세금을 납부해 국가운영을 뒷받침한 기업인과 백해무익한 악덕 기업인을 구별해야 하며, 큰 기업을 일군 기업인을 처벌한다면 세수가 줄어 국가운영이 타격을 받을것이고 결국 빈곤을 추방할수 없을것”이라고 주장했다. 박정희 의장은 이러한 의견을 받아들였다. 구속되어 있던 기업인들을 ‘조국 근대화 사업’에 협력시키는 조건으로 모두 풀어주었으며 이때 만들어진 기업인들의 단체가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이다.

이후 재벌 총수들은 ‘전국경제사범연합회’가 아니냐는 비아냥을 듣는, 대부분 한 번 이상 불법 비자금 조성, 회사자금 횡령, 불법 정치자금과 뇌물 제공, 분식회계, 탈세 등의 범죄를 저질러 재판에 회부되었다. 아예 기소되지 않은 경우가 허다했지만 범죄혐의가 너무나 명확하게 드러난 경우에도 기껏해야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았다. 그나마 시간이 조금 지나면 대통령은 ‘국민경제 활성화와 기업인들의 사기 진작을 위해’ 그들을 사면해주었다. “기업의 탈세와 불법은 불합리한 제도 때문이며, 기업인을 처벌하면 경제가 위축되어 침체한다”는 이병철 회장의 견해는 대통령과 판검사, 언론이 모두 추종하는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1970년대 정부가 해외에서 차관을 들여와 국내에서 독과점 지위를 쥐어준 국내 대기업들은 빠르게 자본을 축적했다. 196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세계사에서 한국보다 고도성장을 기록한 국가는 중국뿐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것을 이루기 위해 18년 동안 철권통치를 했는데 사회주의든 자본주의든 중앙통제식 계획경제는 반드시 전체주의 독재를 낳게 된다.

경제적인 면에서 선진국을 따라잡으려면 우리도 부가가치가 높은 중화학공업과 첨단산업을 보유해야 한다. 그런데 철강, 금속, 자동차, 화학, 플랜트 같은 중화학산업과 전자, 통신, 반도체, 항공 등 첨단산업에는 막대한 설비투자가 필요하다. 그 투자재원을 조달할수 있는 주체는 국가와 재벌밖에 없다. 만약 국영기업을 세워 중화학산업과 첨단산업을 육성할 경우 국가 중심의 계획경제 또는 국가독점자본주의를 계속 해야 한다. 민간에 맡기면 결국 기존의 재벌 말고는 자본의 원시적 축적 주체가 없다. 그런데 국가독점자본주의도 민간독점자본주의도 바람직하다고 하기 어렵다. 둘다 거부하면 주력산업의 교체 속도는 느려진다. 결정권이 있었다면 우리는 무엇을 선택해야 했을까?

산업화의 성공은 정부와 재벌의 관계를 뒤바꿔놓았다. 처음에는 정부가 갑이고 재벌이 을이었다. 정부의 사업허가와 자금을 배정받아야 사업을 할수 있었기 때문에 기업인들은 불법 비자금을 만들어 대통령과 권력실세들에게 바쳤다. 대통령 눈 밖에 나면 어떤 기업도 살아남을수 없었다. 그런데 처음에는 정부가 제공하는 산업자금에 의존했던 국내 대기업들은 향후 금융기관의 대출, 주식시장을 통한 직접금융 조달, 영업이익의 사내유보 등을 통해 거대한 자본의 성채를 구축했다. 1980년대 3저 호황과 고도성장기를 거쳐 막대한 자본축적과 정치적으로 민주화가 이뤄지자 정부가 권력으로 기업을 관리하는것이 아니라 재벌이 돈으로 정치권력을 관리하게 되었다. 재벌은 대통령과 집권세력 뿐만 아니라 야당 정치인에게도 정치자금과 선거자금을 제공했다.

대한민국 건설사가 중동국가를 비롯한 외국에서 지은 건물과 교량이 무너진 일은 없었다. 그런데 나라 안에서 지은 것은 종종 무너졌다. 여러원인이 있지만 결정적인것은 부정부패였다. 우리나라 재벌그룹은 대부분 건설사를 계열사로 보유하고 있다. 없으면 만들었고, 만들지 못했으면 인수합병했다. 그 목적은 불법 비자금 조성이었다. 그 비자금의 일부는 환경, 교통, 안전 등과 관련해 토목건축사업 인허가권을 쥔 고위공무원과 실무를 맡은 현장공무원, 설계와 감리 또는 안전진단을 하는 전문가들에게 흘러들어갔다. 그리고 재벌총수의 개인금고를 거쳐 대통령과 청와대 참모, 국회의 유력 정치인과 정당으로 들어갔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은법이다. 우리 사회 전체가 부패문화에 젖어들었다. 이 모두가 재벌 탓은 아니겠지만 부패문화의 진원지가 재벌과 정치권력의 유착에서 나온것은 분명했다. 재벌이 새로운 지배계급으로 헌법 위에 군림하는 사태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은 국가권력을 통한 정치적·민주적 개입과 통제 뿐이다. 이것은 ‘경제민주화’의 핵심이다.

IMF 외환위기, 재벌들을 살려준 이유

1990년대 중반은 ‘단군 이래 최대 호황’이라는 말이 나올정도로 민간소비와 기업의 설비투자가 활발했다. 냉전시대가 허물어지면서 소련, 중국, 동유럽은 새로운 수출시장이 되었다. 1995년에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발효된 GATT(관세와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을 뛰어넘는 WTO(세계무역기구)가 출범했으며, 1996년에는 경제개발협력기구(OECD)에 가입했다.

김영삼 대통령은 집권 초기 대통령 긴급명령이라는 비상수단을 동원해 금융실명제를 전격 도입하고 공직자 재산등록 제도를 실시했다. 국민경제를 투명화하고 정경유착의 고리를 끊기 위한 급진적 제도개혁을 단행했다. 그러나 김영삼 정부는 국내 금융산업에 대한 규제와 민간기업의 자본수입 규제를 대폭 완화하면 한국은행의 통화관리 능력이 크게 위축된다는 점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했다. 규제의 족쇄에서 풀려난 우리나라 금융기업들은 선진국에서 이자율이 상대적으로 낮은 단기외채를 얻어 금리가 높은 동남아 기업에 장기대출 함으로써 중간이윤을 남겼다.

그런데 1990년대 중반 태국과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 국가들이 잇달아 외환위기에 빠졌다. 국내에서도 정경유착으로 인한 불법대출 사건이 이어진 끝에 1997년 여름까지 한보, 삼미, 진로, 대농, 한신공영, 기아 등 대형 재벌그룹들이 줄줄이 부도가 났다. 재벌그룹의 연쇄부도로 금융기업들은 막대한 부실채권을 떠안게 되었다. 금융기업의 재무 건전성이 악화되자 한국경제 전체의 신뢰가 하락했다. 외국 금융기업들은 단기채 채무상환기간 연장을 거부하기 시작했다. 아울러 당시 맹위를 떨치던 국제투기자본이 한국경제를 먹잇감으로 지목하고 원화와 원화표시 자산을 투매했다. 무디스와 S&P를 위시한 국제신용평가기관들은 재빨리 한국 경제 신인도를 낮췄고 환율이 더 오를것으로 예측한 수출기업들은 수출대금을 국내로 들여오지 않고 밖에다 그대로 두었다.

코스피 종합주가지수는 500pt가 무너졌고 나중에 300pt까지 내려갔다. 1997년 11월 21일 정부는 국제투자기금(IMF)에 자금지원을 요청했고, 11월 29일 IMF는 구제금융을 제공한다고 발표했다. 12월 3일 임창렬 경제부총리와 캉드쉬 IMF 총재는 210억 달러의 구제금융 협약서에 서명했다. 캉드쉬 총재는 협약을 충실하게 이행하겠다는 서약서에 김대중, 이회창, 이인제 등 유력 대통령 후보들의 서명을 받았다. IMF의 ‘경제신탁통치’가 시작된것이다.

IMF가 추구한 목표는 박정희 정부 아래 남아있던 중앙통제식 계획경제 요소를 완전히 없애고 미국식 신자유주의 경제 시스템을 이식하는 한편, IMF의 구제금융 자금뿐만 아니라 미국, 유럽, 일본의 금융기관이 한국 금융기관과 기업에 제공한 대출금과 이자를 완벽하게 회수하는 것이었다. 우리 정부는 외국자본을 끌어들이기 위해 외국인 직접투자에 대한 제한을 철폐하고 자본시장을 전면 개방했다. 이 모든것은 IMF가 중남미와 동남아시아 등 구제금융을 받은 모든 나라에 내린 표준처방이었다.

2001년 구제금융 전액을 상환한 대한민국은 IMF 경제신탁통치를 마감했 다. 한국경제에서 삼성, 현대, LG, 대우, SK같은 대형 재벌그룹이 망하면 수많은 협력업체와 자금을 대출한 금융기관이 망하고 거기서 일하는 노동자는 실업자가 된다는 것을 여실히 체험했다. 재벌 총수들이 회사를 잘못 운영해 망할 위기에 빠져도 국민경제를 살리기 위해서는 정부가 회사를 살려줘야 한다. 재벌 입장에서는 위험한 투자를 해서 돈을 벌면 자기것이 되고, 방만한 경영을 해서 문제가 생기면 국가와 국민에게 짐을 떠넘길수 있다. 이런식으로 이익을 사유화하고 손실은 사회화 했다. 바로 이와같은 국가 안전망이 있기 떄문에 재벌들은 두려움 없이 위험하고 방만한 차입경영을 할수 있었다.

경제위기는 자본주의 역사에서 끊임없이 반복되었고 그때마다 경제력 집중을 더 심화시켰다. IMF 경제위기의 소용돌이 속에서 여럿 재벌그룹들이 해체되었지만 삼성, LG, SK, 현대차, 롯데, 한화, 한진, 동양, 대림, 효성, 코오롱, 두산, 대상, 한솔, 금호, 동부, CJ 그룹은 더 거대한 기업집단으로 성장했다. 정리해고제 도입으로 대량실업의 공포가 노동시장을 뒤덮자 노동조합은 더욱 약해졌고 실질임금은 하락했다.

김대중, 노무현으로 이어지는 진보정권 10년동안 IMF 경제위기를 탈출하고 새로운 발전전략을 찾기 위해 노력했지만 결과적으로 만족할만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디에이치리뷰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