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세계는 서양이 주도하게 되었는가? 감상문 1편
2025년, 아직 서구가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국의 부상으로 아시아가 차세대 중심축으로 거론되고 있지만 이 말의 뜻은 결국 아직은 서구가 중심이란 이야기와 다를바 없다. 그럼 언제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풀어야 어떻게 세계를 서양이 주도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설명할수 있을까?
내가 오늘 주제로 삼은 책 『어떻게 세계는 서양이 주도하게 되었는가』의 저자는 미국 휘티어 대학의 역사학과 교수 로버트 b. 마르크스 다. 그는 20년 넘게 학부생들을 대상으로 동양사와 세계사를 가르치고 있으며, 특히 근대 세계사를 주로 강의하고 있다. 이 책은 그가 지난 200년간의 세계사를 되짚어볼 뿐만 아니라 지난 14세기부터 21세기까지의 역사를 탐구, 동양이 어떻게 서양에게 경제적 주도권을 넘겨주게 되었는지를 자세히 언급한다.
원래 경제는 아시아였다
그렇다. 원래 세계경제를 먼저 장악한건 동양이었다. 그리다가 산업혁명으로 역전당해 주도권을 넘겨준것이다. 서구가 우월하고 동양이 열등하기 때문에 역전된것은 아니었다. 서구의 역전은 우연의 산물일 뿐이었다. 1775년 아시아는 세계생산의 약 80%를 담당했다. 다른말로 하면 세계인구의 3분의 2를 차지하고 있던 아시아가 세계 생산의 5분의 4를 담당했다는것이며, 또 다른 말로는 아시아를 제외한 아프리카, 아메리카, 유럽인들이 모두 합쳐 세계 생산의 겨우 5분의 1만을 담당했다는 의미다.
이것은 로버트b. 마르크스(Robert b. marks) 뿐만 아니라 케네스 포머런츠(Kenneth Pomeranz) 또한 『위대한 전환(The Great Divergence)』에서 주장했다. 당시 중국은 강희제(1661-1722)와 건륭제(1735-1796)를 거치며 경제적으로 번영했던 시기로 도자기, 차, 비단 등의 무역을 통해 유럽으로부터 엄청난 양의 은을 흡수 하고 있었다. 인도는 세계에서 가장 큰 면직물 산업 생태계가 구성되어 있어서 전세계 면 생산량의 4분의 1을 공급했다. 이에 영국이 면직물 관련 자국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보호무역을 시행, 1717년 프랑스 정부도 인도산 면직물과 중국산 비단 수입을 금지하는 법안을 통과 시켰다. 18세기 인도의 노동자들은 영국 노동자들보다 높은 생활수준을 유지했다.
또한 최근 20년동안 학자들이 연구한 결과 시장(market)은 유럽에서 최초로 시작되어 가장 발전된 형태로 진화한것이 아니라 이미 18~19세기에 중국에서 고도로 발달한 효율적인 시장이 형성되어 있었다고 알려졌다. 어쩌면 영국 등 서구 열강들이 중국에 들어가 시장논리를 흡수해 빠르게 유럽에 전파했을 가능성, 그리고 마치 시장은 본인들이 만든것처럼 주장했을 가능성도 배제할수 없다. 영국이 그동안 세계사에 뿌린 행태를 감안할때 충분하고도 넘친다.
하지만 19세기 이후 200년 이라는 짧은 기간에 세계는 엄청난 부(富)의 역전현상을 경험했다. 어떻게 18세기에 전 세계 부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던 중국과 인도가 2백년만에 세계에서 가장 산업화가 늦고 가장 가난한 국가가 되었을까? 1750년대 유럽 일부 국가들의 발전 수준이 아시아 핵심 국가들의 수준에 근접했을때, 아시아 뿐만 아니라 유럽까지 포함하는 유라시아 대륙의 최고 선진국에 속했던 아시아의 선진국들은 더 이상 성장할수 없는 <환경적 및 생태적 한계>에 직면하게 되었다.
유럽의 부상과 유럽 중심적 세계관
유럽인들은 중세에 암흑에 있었고 근대에 와서 부상했다. 유럽인들은 처음에 자신들의 우월성을 기독교에서 찾았다. 그러다가 17~18세기에 계몽주의 시대로 접어들며 그리스 문화의 유산에서 기인한 이성적이며 과학적인 사고에 자신들의 우월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당대 유럽인들은 서구의 부상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주장을 했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민주주의 사상을 창안하고 고대 로마인들에게 물려주었지만 로마제국 몰락과 더불어 암흑기가 도래하면서 그만 바통을 떨어뜨리고 말았다고, 그러나 이윽고 기독교가 그 바통을 이어받아 봉건시대 유럽의 독특한 문화를 창조하면서 다시금 질주하여 고대 그리스의 유산이 르데상스 시대에 재발견되고 계몽시대로 들어와 보다 정교하게 다듬어지면서 마침내 프랑스 혁명, 미국 독립전쟁을 통해 서구의 부상으로 완성되었다고 말이다.
유럽 중심적 세계관은 유럽을 세계사의 유일한 형성자, 심지어 세계사의 근원으로 간주한다. 그리고 세계가 이루어지는 방식과 세계를 바라보는 유럽 중심적 사상은 미국인들에 의해 계승, 유지되고 있다. 실제로 미국의 역사는 이따금 가장 순수하고 가장 잘 표현된 서구 식민화의 정점으로 간주된다. 해가지지 않는 나라 영국이 대영제국을 이룰수 있었던 이유는 특히 영국에 석탄이 풍부하게 매장되어 있었고 그것을 이용해 증기기관 동력을 만들어내고 산업혁명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만약 영국이 위치한 땅속에 석탄이 매장되어 있지 않았다면 산업혁명도 일어나지 않았을것이다.
세계사적 관점에서 중요한 또 하나는 7세기부터 17세기 까지 일어난 이슬람의 탄생과 확장이다. 이슬람 제국은 서쪽으로 지중해와 동쪽으로 인도양 너머 인도네시아까지 진출했다. 아시아가 유라시아 대륙 전역의 무역상들에게 관심의 대상이었다면, 이슬람 제국은 이처럼 엄청난 부를 지닌 아시아에 대한 유럽의 접근을 철저히 차단하여 인도양과 중국에 이르는 새로운 항로를 개척하려는 유럽인들의 욕망을 자극했다.
1400년대 세계
산업혁명 이전에는 모든 경제활동이 태양 에너지에 의존했다. 국가의 성장은 인구증가에, 인구증가는 농업 생산량 증가에, 농업생산은 태양에너지에 각각 의존했다. 동물들도 자연의 바람이나 계절, 날씨 등에 크게 의존하듯이 인류 또한 태양과 자연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이러한 구조적인 측면 떄문에 유럽, 아시아, 아메리카 모든 지역에서 전염병과 기근이 있었고 때문에 인구가 자연적으로 제한되었다.
1400년대 인구는 3억 5천만명, 1800년대는 7억 5천만명 정도다. 그리고 그 400년 동안 전체인구의 80%는 농민 계층이 차지했다. 그들은 토지를 경작해 자신들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소비할 식량까지 생산했다. 그래서 당시 기후변화는 식량생산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기온, 복사열, 강우량과 같은 변수는 밀과 쌀을 비롯한 모든 작물의 성장에 영향을 미쳤다. 좋은 기후 조건은 수확량을 증가시켰지만 그 반대의 경우 엄청난 재앙을 초래하기도 했다. 장기간에 걸친 기온저하는 식량공급 감소로 연결되고 이는 사회의 인구 감소로 이어진다.
1400년대 3억 5천만명의 인구가 지구 전역에 골고루 분포된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은 몇몇 지역들에 몰려 살면서 높은 인구 밀도를 이루었다. 실제로 지구의 육지면적 7%에 불과한곳에 인구 대부분이 거주하고 있었다. 그렇게 된 이유는 그 지역들이 농업에 가장 적합했고 다른 지역들은 늪, 초원, 사막, 빙하여서 식량생산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처럼 인구 밀도가 높은 지역들에는 고도로 발달된 15개의 문명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상황이 현재까지도 지속되고 있다.
농업혁명이 불러 일으킨 변화
인구 밀도가 높고 고도로 발달된 이 15개의 문명에는 몇가지 공통점이 존재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사항은 식량을 생산하는 농촌에 거주하는 사람들과 농촌에서 생산된 잉여 식량을 소비하는 도시에 거주하는 사람들 간의 관계였다. 아마도 도시에 거주하는 지배계층은 농촌에서 생산된 식량을 확보하기 위한 수단을 끊임없이 고안했을것이다. 그런 도시와 농촌의 관계에 대해서부터 이야기하려면 기원전 5000-8000년 당시 일어난 농업혁명 까지 거슬러 올라가봐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농업혁명이 시작된 지역에서조차 농업의 발전이 아주 오랜기간에 걸쳐 서서히 이뤄졌다는 이유로 <혁명> 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반대한다. 그러나 농업은 사람들의 생활방식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농업은 한 해에 자신들이 소비하는 양보다 훨씬 많은 양의 식량을 수확하는것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이른바 잉여작물 탄생. 그 결과 식량 생산에 직접 종사하지 않는 사회 계층, 즉 지배자나 사제, 전사, 유목민 등이 부상하게 되었다. 농업혁명이 있기전에는 모두 식량 생산에 몰두했어야 했다.
지배자와 전사들은 잉여 식량을 외부의 침략자들로부터 지키는 임무를 수행했고, 사제들은 잉여 식량이 가능하도록 제사를 지내고 세계가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했다. 이처럼 잉여작물 생산과 그것을 잘 보호해내기 위해 각자 필요하면서도 잘할수 있는 역할들이 생겨났다. 물론 분쟁도 있었다. 정기적인 잉여 작물의 제공은 ‘세금’이라는 이름으로 간소화 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농민계층과 상류층 지배계급의 심각한 분열이 일어나기도 했다.
농업혁명으로 인한 문명이 이어지면서 <도시와 문자>가 탄생했다. 사제들과 지배자들은 식량생산에 종사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농민들과 멀리 떨어진 거주지에서 생활할수 있었다. 지배자들은 장인들을 고용하여 옷, 무기, 건물 등을 만들었고 그 결과 도시라 불리는 거대한 군락이 탄생했다. 그곳에서 지배계층은 농민계층의 인구와 식량의 수확량을 관리하기 위해 세금을 부과했고, 그 내역을 기록하기 위해 계산 체계, 문자 체계가 발전했다.
문자 체계의 발전은 인구와 세금을 기록하는 기능 외에도 사제들에게 대단히 유용하게 쓰였다. 그들은 종교의 기원에 대한 내용을 기록했고, 농업 행사와 제례 의식을 위한 달력을 제작했으며, 미래를 예언하는데 문자를 사용했다. 잉여작물이 세금으로, 세금이 기록을 위한 문자 체계의 발전으로, 문자 체계의 발전이 종교와 학문으로 누구의 의도도 없었지만 필요에 의해 자연스럽게 빌드업 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좀 부족한 점이 있었다. 한 도시와 그 주변의 농촌지역만으로는 자급자족 하기 어려웠다. 사람들은 구리, 주석, 철과 같은 물자와 가축, 그리고 말(horse)을 구하기 위해 다른 도시, 유목민들과 교역하기 시작했다. 만약 필요한 물자가 생존을 결정하는 문제라고 판단되면 교역 대신 그 지역을 장악하기 위해 전쟁을 벌이기도 했다. 이런 성향은 <제국의 부상, Empire> 으로 연결되었다. 인간의 삶과 역사의 진보는 천천히 뜯어보면 그 누구나 쉽게 이해할수 있는 매커니즘을 갖고 있었다.
한편, 비록 세계 인구의 80%가 농부였고 그들이 모두 농촌에 거주하면서 식량 생산에 종사하지 않는 도시 사람들을 모두 먹여살릴수 있게 되자 다양한 기능을 지닌 도시들이 태어났다. 1400년대에 세계에서 가장 큰 25개 도시들은 큰 변동없이 대부분 오늘날 까지도 대도시로 남아있다. 하지만 그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의 인구는 세계 인구의 고작 1%에 불과했다. 한가지 놀라운 사실은 1400년대에 세계적으로 가장 큰 25대 대도시들 가운데 9개 도시가 모두 중국에 있었다는 것이다. 파리가 그나마 세계적인 대도시 순위에서 4위를 차지, 유럽에 속한 도시로는 최상이었다. 그 밖에 지중해의 콘스탄티노플, 유라시아를 관통하는 동서 무역의 요충지 사마르칸트, 그리고 아프리카 무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모로코의 페스가 대도시로 꼽혔다.
농민들에게 도시는 신기하고 경이로운 곳이었다. 엄청난 갑부들은 꿈에서나 상상할수 있는 산해진미를 먹었고 별다른 일도 하지않고 모든 혜택을 누렸다. 농업에 기반을 둔 문명들이 유라시아 대륙 전역에 걸쳐 가장 비옥한 토지를 모두 차지했을때 유목민들은 방대한 대륙의 동서를 가로지르며 이어진 대초원을, 사막과 늪지를, 물이 너무나 부족한 사막을 헤짚고 다닐수 밖에 없었다. 유목민들은 말, 양, 소, 염소 등의 가축을 목초가 풍부한 대초원으로 몰고 다니며 사냥과 채집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집단이다.
그러나 농업문명과 달리 자급자족했기 때문에 완전히 모든걸 스스로 충족시킬수 없었다. 빈곤과 결핍은 두가지 중 하나를 선택하게 했다. 교역 또는 침략이었다. 유목민들은 대 초원을 뛰어다니는 노련한 기마병이자 가축 사냥을 위한 뛰어난 궁수였다. 기후변화로 목초지가 메마르고 식량 수급에 위기가 닥쳐 생존의 위협을 느꼈을땐 그들은 도시든 제국이든 관계없이 주저없이 문명을 침략했다. 문명의 중심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런 유목민들은 문명을 거부하는 집단으로 여겨졌다. 그들은 도시에 정착하지 않았고 무례하고 무식했으며 미신을 신봉하는듯 보였다. 한마디로 야만인들이었다. 여러 문명들은 세력이 약해질 떄마다 유목민들의 약탈과 침략에 시달렸고 심지어 그들에게 정복당할 위험에 처했다. 대국이었던 로마와 중국의 한(漢)나라(AD 300-600) 도 이들에게 의해 몰락 당했다.
인구증가와 농민의 역할
인구증가와 감소는 사람들이 지구촌 생태계에서 더 많은 식량과 에너지를 확보하는데 성공했는지의 여부를 가늠하는 척도다. 인구증가는 분명 문명과 도시, 교육, 무역뿐만 아니라 자연세계에 대한 이해수준을 한층 높여준다. 따라서 인구 증가는 생활수준의 향상을 야기한다. 하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다. 인구증가에 걸맞는 식량수급이 허용되지 않을 때다. 이 땐 질병과 기아, 전쟁을 통한 사망률이 높아지며 인구가 줄어든다.
인구증가는 추가적인 식량과 에너지 공급을 필요로 한다. 1400년대 농업기술을 고려하면 추가적인 식량공급을 충당할수 있는 방법은 다음과 같은 3가지 뿐이었다.
- 더 많은 토지 경작
- 할당된 토지에 투입되는 노동량 증대
- 물이나 비료의 양 증대
농업은 더 많은 토지에 적정한 물이나 비료를 넣어 최대 생산량을 산출할수 있겠으나, 반대로 다른 조건이 그대로라고 하더라도 물이나 비료, 노동량, 토지 경작면적 등이 부족할경우 생산량은 감소할수 밖에 없다. 그런점에서 중국은 1400년대부터 1800년대까지 인구가 8천 5백만명에서 → 3억 2천만명으로 4배 증가했는데 그 엄청난 인구를 부양할 식량이 공급되었던것이다.
6·25를 겪은 남한의 세대들이 적화통일을 꿈꾸는 세력들에게 생존의 위협을 느끼듯 1400년대를 살았던 사람들에게 식량부족과 기근, 기아는 모두 생존과 직결되는 중요한 문제였다. 농업중심 사회에서 기근과 기아, 식량부족은 자연적 원인 즉, 기후의 영향이 매우 컸다. 그러나 봉건사회에서 수확량이 줄어드는 시기에도 지주들은 가혹한 착취를 멈추지 않았고 아이러니하게도 농민들은 기아에 빠졌다.
이 사실을 이해하는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농업세계는 애초에 초기부터 상류층 지배계급에 의해 탄생된것이 아니다. 명시적이든 암묵적이든 국가와 지주, 농민 계층간의 이해와 동의와 상호교류를 통해 성립된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맥락에서 농민계층은 자신들의 사회적 권리를 인식하고 어떤 상황에서 그 권리를 주장할수 있는지 판단할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판단능력과 함께 농민 사회의 응집력이 굉장히 중요했다. 지배세력은 국가나 지주들이 가혹한 처사로 농민들의 삶을 위협하여 그들이 아무리 분노할지라도 막강한 무력행사로 반란을 차단한다. 이때 농민 사회의 응집력이 없다면, 집단행동을 실행한 능력이 없다면 그저 침묵하며 고통에 시달리거나 기나긴 겨울을 견디지 못한채 죽는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농민의 반란은 세계 곳곳에서 발생했다. 일본에서는 1590년부터 1871년까지 단순방화에서 무기를 들고 투쟁하는 무력봉기에 이르기까지 무려 3천번이 넘는 농민반란이 있었으며, 중국에서도 1600년대 중반의 민란과 1800년대 중반의 태평천국운동처럼 대규모 농민 반란이 일어났다. 러시아에서도 대규모 농민 반란이후에 결국 레닌의 공산당이 만들어졌고 프랑스도 1789년 프랑스 혁명과 더불어 여러차례 농민 반란이 일어났다. 유럽의 영국과 독일, 이탈리아도 예외는 아니었다.
농민계층은 정부를 비롯해 군사, 행정, 무역을 장악한 지배계층을 먹여 살렸다. 어느 역사학자의 표현에 의하면 농민계층은 【그들에게 의존하며 살아가는 다양한 형태의 거대한 인간 기생충】 들을 탄생시켰다. 이처럼 사람들이 거대한 기생충(정부, 지주)과 작은 기생충(병원균)과 싸우다가 죽어나가면서 인구는 크게 늘지 못했다. 즉 계속된 출산에도 불구하고 지배 계층은 농민계층을 핍박하여, 여러 문명들은 침략자들과 싸워 패배하여, 병균은 드러나지 않게 옮아서 많은 사람들을 죽게 하였다. 이 당시의 세계에서 인간은 전적으로 환경에 의존하며 살아갔기 때문에 환경이 인간의 행위에 허용하는 기회와 한계를 명심해야만 했다.
다양한 무역로가 탄생시킨 상업의 세계
페스트(흑사병)는 간상균을 통해 감염되는 전염병으로 중국 남서부에 서식하는 설치류(쥐과)에 널리 퍼져 있었다. 몽골이 유럽과 중국을 좌절시킨 1300년대 중반부터 후반까지 → 중국에서 유럽까지 흑사병이 확산된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사실상 유라시아 전역을 연결하여 온갖 물자와 사상, 병균까지도 대륙의 한쪽에서 반대쪽 끝까지 이동할수 있게 만든, 몽골이 만들어낸 무역망 때문이었다.
이 병균은 사람에게 전염되지 않고 설치류의 체내에서만 기생할수도 있지만 일단 벼룩을 통해 인체에 감염되면 그 사람은 보통 며칠안에 사망했다. 페스트에 감염된 설치류의 서식지 근처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벼룩이나 설치류로부터 안전한 거리를 유지하도록 금기사항을 마련했다. 그러나 페스트에 감염된 지역으로 이동하는 이방인들이나 이주민들은 이런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는데, 1330년대 중국 남서부에서 실제로 그런 불행한 상황이 발생했다. 그 지역 원정을 나선 몽골군대가 벼룩이나 페스트에 감염된 설치류와 함께 인구밀도가 높은 지역으로 이동했던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듬해인 1331년, 마침내 무서운 흑사병이 확산되기 시작했고 일부 지역에서는 무려 인구의 3분의 2가 사망했다는 기록까지 전해진다.
전염병이 세계사에 이토록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것은 그것들이 여러 상황들의 상호작용을 통해 발생했기 때문이며, 유럽의 인구가 불과 몇년 사이에 8천만명에서 → 6천만명으로, 중국에서는 1200년대 1억 2천만명이었던 인구가 → 1393년에 8,500만명으로 급감했다는점에서 의의가 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이것을 언급한 이유는 14세기에 중국, 몽골, 유럽, 러시아 등 세계 곳곳에서 확산된 전염병은 유럽과 동아시아의 상호관계를 나타내고 있다는것이다. 무역로를 따라 물자와 사람 사상 뿐만 아니라 전염병까지 전파되었다는것이다.
당시 구세계에서는 유럽과 아시아, 아프리카 3개의 대륙만 존재했다. 아직 인류의 역사를 기록할때 아메리카(북미, 남미 포함)와 호주는 존재하지 않았고 당연히 남극과 북극도 없었다. 따라서 그동안 역사학자들은 1500년대 이후 콜럼버스와 바스코 다 가마가 항해하여 신세계를 발견했을때 부터 <세계 체제> 라는 용어를 도입하고 있으나 현대의 많은 역사학자들은 1500년대 이후의 세계체제가 최초의 탄생이 아니라 그 이전의 다른 체제에서의 발전이라고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