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시민의 ‘나의 근현대사’ [1편] 독후감
이 책은 2014년 7월 7일 초판 발행된 책으로 1959년부터 2014년까지 55년의 한국 근현대사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저자 ‘유시민’이라는 이름 세글자 만으로도 “어떤 방식으로 근현대사를 설명했을까?”라는 궁금증을 갖기에 충분했다. 다음에 기록한 내용들은 유시민 작가의 의중을 책에서 본따 요약한것이다.
주관적인, 위험한 역사
모든 역사는 주관적 기록이다. 이를테면 방송뉴스와 신문보도가 현재를 실제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지 않는것과 마찬가지다. 언론은 수많은 사건 가운데 본인이 스스로 주목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한것만 선택해서 보도한다. 그리고 서로 다른 목적과 시각을 가지고 해석한다. 때문에 같은 주제를 갖고 이야기 하더라도 다른 결과를 내놓는다. 역사가들도 각자의 가치관과 세계관을 지니고 있다. 그들 또한 과거의 사실 가운데 자신이 주목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한것을 선택해 자신의 시각으로 해석한다. 사실의 선택, 선택한 사실의 해석 2가지 모두 주관적일수 밖에 없는 이유다. 그래서 결국 역사를 둘러싼 다툼은 필연적으로 발생한다.
역사중에서 현대사는 특별히 민감하다. 현대사의 경우 우리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사의 이러한 특수성은 서로 다른 국가 사이의 역사논쟁에서 매우 선명하게 드러난다. 한국인들은 일본에 대해서 독도가 우리땅이라며, 위안부 문제를 사과하라며 목소리를 높이지만 정작 베트남전쟁 파병 및 민간인 학살에 대해선 토론을 기피하고 사실을 부정한다. 일본에 대해선 잘못된 과거사를 직시하고 반성하라고 하면서도 우리 자신의 잘못된 역사를 직시하고 반성하는 것은 완강히 거부한다.
그래서 현대사 논쟁은 고대사나 중세사 논쟁과 달리 격렬한 감정의 표출과 정치적 대립을 동반하기에 위험이 따른다. 다수 대중의 판단과 정서에 어긋나게 말하면 험악한 구설에 휘말린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시민은 감당할만한 가치가 있는 위험을 감수하는 인생도 그리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며 직접 보고 겪은 대한민국 현대사를 써보겠다고 했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 그 자체가 객관적인 진리를 이야기한다고 믿는것은 순진한 착각일 뿐이다. 사실은 스스로 말하지 못한다. 역사가가 허락할때만 말을 한다. 역사가는 제멋대로 사실을 만들거나 바꿀수 없지만 사실의 노예인것도 아니다. 거듭 말하지만, 역사는 주관적인 기록이다. 누가 쓴 어떤 역사도 과거를 ‘원래 그러했던 그대로 ‘ 보여주지 않는다. 그래서 ‘뉴라이트’ 교과서 논쟁이 치열했던 것이다.
흐름속에 있는 것은 사건만이 아니다. 역사가 자신도 그 속에 있다. 어떤 역사책을 집어들때, 책 표지에 있는 저자의 이름을 살펴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출간일자나 집필일자도 살펴봐야 한다. 그런것이 때로 훨씬 많은 것을 누설한다. 우리를 압살하고 지나가는 근대화와 자본의 맹목적이고 무서운 속도를 일시 정지시키고 ‘이것이 과연 인간다운 것인가’ 물었던것, 그것이 1980년에서 내가 가져온 작은 불꽃이다. 나는 이 불꽃으로 우리의 삶 전체를 그러나 아죽 작은것들 하나하나를 비추어 보려 한다. 1980년대 내내 나는 얼마나 비관주의자였다. 그러나 이제야말로 나는 고통스러운 자기응시를 통해 작지만 단단한 희망을 말하고 싶다. “30년에 300년을 산 사람은 어떻게 자기 자신일수 있을까?”는 나의 고통스러운 자기응시에 붙여진 이름이다
5·16 산업화 세력 Vs 4·19, 5·18 민주화 세력
출판시장에서 인기 있는 한국 현대사는 대부분 진보 성향 지식인들의 작품이다. 반면 그 시대를 찬양하는 보수 성향 지식인들의 책은 잘 팔리지 않는다. 인터넷서점의 매출 실적이 극히 빈약하며 독자서평도 거의 없다. 그러나 “이성적인 것은 현실적이며, 현실적인것은 이성적이다” 라는 철학자 헤겔의 주장처럼 현실에서 벌어지는 일은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김대중, 노무현 민주화를 대표하는 10년의 정권이 지나간후 이명박, 박근혜가 대통령에 당선된 이유를 단순하게 폄하해선 안된다.
우리의 역사전쟁에는 분명한 주체가 둘 있다. 5·16, 산업화시대를 대표하는 세력과 4·19, 5·18, 민주화시대를 대표하는 세력이다.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딱 10년 동안 정치권력 하나만을 장악했던 민주화 세력과 달리 산업화세력은 경제권력, 원론권력 등 사회의 다른 모든 권력을 그 10년을 제외한 모든 기간동안 수중에 쥐고 있었다.
한국 현대사는 이 두 세력의 분투와 경쟁의 기록이다. 대한민국은 박정희 시대와 김대중·노무현 시대를 거쳐왔다. 이 둘은 모두 우리의 과거다. 만약 둘중 하나만을 긍정해야 한다면 역사와 현실의 절반을 부정해야 한다. 이것이 온전한 역사인식, 현실인식일리 없다. 색깔과 모양이 크게 다르지만 2가지 모두 국민들의 내면에 자리잡고 있는 엄연한 우리의 역사다.
우리나라의 보수와 진보는 한 사회에 동시에 존재하기 어려울정도로 생각과 지향의 차이가 크다. 이것은 대한민국의 경제·정치·문화적 변화속도가 너무 빨랐던 탓에 생긴 현상이다. 서유럽에서 300여 년에 걸쳐 진행된 변화가 우리나라에서는 겨우 50년 동안에 일어났다. 이것은 단순한 정당 사이의 권력다툼이 아니라 서로 다른 가치관과 인생관의 투쟁이었고, 서로 다른 문화의 갈등이었으며 서로 다른 역사인식의 충돌이었다.
평등하게 가난했던 독재국가
1959년 대한민국은 가난한 나라였다. 1945년 광복, 1948년 정부수립, 1953년 6·25전쟁 종전선언이 있은지 각각 14년, 11년, 6년밖에 안된 시기였다. 세끼 밥도 제때 먹지 못했고 주택은 대부분 초가집이었으며 양옥은 희귀했고 아파트는 전국 어디에도 없었다. 사람들은 숯과 나무를 때서 물을 끓이고 밥을 짓고 방을 데웠으며 전기는 도시 일부지역에만 들어왔고 상수도와 하수도가 거의 없었다.
그런데 미국이라는 이웃이 학대와 굶주림, 질병으로 숨이 넘어가는 어린아이와 같던 대한민국을 구해주었다. 미국은 대한민국 출생과 성장을 도운 양아버지와 같았다. 좋은 양아버지였든 아니었든 미국이 양아버지였다는것은 부정할수 없는 사실이다. 우리는 미국의 후견과 지원을 받으며 산업화를 이루었다. 1959년에는 평등하게 가난한 독재국가였던 대한민국이 2014년에는 불평등하게 풍요로운 민주국가가 되었다. 주거환경은 상전벽해를 이뤘고 소득이 없는 사람에게는 국가가 최저생계비를 지원하며 배움을 기회를 완전히 놓친 일부 고령층을 제외하면 문맹자가 거의 없어졌다.
정치도 달라졌다. 북한편이라는 의심을 받을만한 우려만 없다면 술자리에서 대통령을 욕을 하든 무슨생각이든 자유롭게 말해도 된다. 국가의 힘이 여전히 강하지만 시민들이 국가권력을 상대로 싸울수는 있게 되었다. 20세기 신생국가들 중에 현대적 산업과 정치적 민주주의를 세우는데 성공한 나라는 거의 없다.
한반도는 여전히 전쟁이 끝나지 않은 분쟁지역으로 남아있지만 대한민국은이제 ‘난민촌’이 아니다. 그러나 일부 사람들은 여전히 ‘난민촌 정서’를 지니고 있는듯 하다. 북한이 6·25 북침(북한이 남한을 쳐들어옴)을 시작으로 1968년 1·21 사태, 1983년 아웅산 테러사건 등 수많은 적대적 행위를 해온것이 사실이나, 대한민국이라고 해서 결백한것은 아니다. 우리도 북한에 대해 많은 비슷한 일을했으나 국민들이 그 사실을 잘 모를 뿐이다. 북한 당국은 종종 험한 말로 대한민국을 비난하고 위협했지만, 정작 북한이 도대체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꼼꼼하게 살펴보고 논리적으로 평가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이명박 정부때 금강산과 개성관광이 중단되었고 천안함 사건이 있었으며 북한의 연평도 폭격도 발생했다. 1959년 국민의 가장 강력한 욕망은 먹고사는 생존의 문제, 북한의 위협과 사회 내부의 혼란에서 자신과 가족의 안전을 지키는 문제였다. 사람들은 이 욕망을 충족할수 있게 해주기만 한다면 어떤 사람이나 집단에게도 복종할 뜻이 있었다. 그렇게 4·19에서 5·16까지 1년을 제외하면, 국민들은 정부 수립 이후 1987년까지 40년동안 권력에 굴종하며 살았다. 이승만 정부는 ‘멸공통일’, 박정희와 전두환 정부는 그와 더불어 ‘경제발전’이라는 목표를 내걸고 힘으로 대중을 억눌렀다. 격렬하게 저항한 사람도 있었지만 대다수는 자유와 인권, 민주주의에 대한 억압을 기꺼이 받아들이거나 어쩔수 없이 굴복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 헌법을 채택했지만 우리 국민은 그때까지 민주공화국이 무엇인지 듣지도 배우지도 겪지도 못했다. 민주공화국은 사유재산제도, 법치주의의 토대 위에서 개인의 인권과 자유, 창의성과 경쟁을 북돋는 체제이며, 정부와 의회 지도자를 선출하고 입법·사법·행정 권력을 분산해 서로 견제하게 함으로써 국가가 시민의 자유와 기본권을 침해하지 못하게 하는 분권적 정치 시스템이다. 민주주의는 개인주의를 바탕으로 타인의 자유와 권리를 부당하게 침해하지 않는 한 욕망을 표출하고 추구할 자유를 무제한 인정한다. 우리는 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해 혁명을 한적이 없지만, 20세기에 지구촌의 주도권을 움켜진 민주주의 정치제도를 가진 나라들이 우리에게 뜻밖의 선물을 안겨주었다.
대한민국은 지구촌 최빈국이었을지 언정 통일 신라 이래 1,500여 년 동안 하나의 국가로 존속해온 강력한 역사적·문화적·역사적 정체성과 통일성을 가진 민족이었다. 한국전쟁은 후삼국시대 이후 1,000년 만에 처음 겪은 동족상잔의 내전이었을정도로 다른 모든 신생국가에 존재하지 않았던 문화적 특성을 보유하고 있었다. 아울러 중앙집권 정치체제에 익숙한 민족이다. 보통 상이한 인종과 종교, 그리고 크게 다른 문화와 전통이 뿌리내린 나라는 국민의 힘을 하나로 모으기 어렵다. 이슬람권과 달리 종교와 세속권력이 결합해 변화와 혁신을 봉쇄하는 일도 없었다. 한국인들은 일제침략기에 국채보상운동을 벌였고, IMF외환위기때 금모으기 운동을 한 민족이다.
사고하는 역사가는 엄밀하게 말하면 과거의 문제를 풀고 있는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를 짓누르고 있는 문제와 씨름하고 있는것이다. 그리고 가장 긴급하게 해결을 요하는 문제들 가운데 하나는 바로 우리의 역사성에 관한것이다. 말하자면 우리는 책임감 있게 행동할수 있기 위해서 우리의 역사를 회피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그것으로부터 우리를 분리해야만 하는 긴장관계를 견뎌 내야만 한다.
냉전의 모델하우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정권조차 모두 국민의 수준을 반영한 정부였다. 과거에는 대한민국 국민이 훨씬 더 훌륭한 정부를 가질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은 공부와 경험이 아직 부족한 청년의 순진한 낙관론이었다. 그때 대한민국 국민에게는 민주주의를 손에 넣을만한 의지와 능력이 없었다. ‘국민의 수준’에는 훌륭한 사람을 대통령으로 선출하는 능력뿐만 아니라 자유롭고 민주적인 선거제도를 만들고 운영하는 능력도 포함되기 때문이다.
정치인 이승만은 1919년부터 1925년까지 임시정부 대통령을 할 정도로 널리 인정받는 독립운동가였지만 1945년 광복이후에는 한반도에 지구촌 냉전체제의 모델하우스를 세웠다. 공산화의 위험을 감수하면서 통일국가로 가는길과 북한을 공산주의자들에게 넘겨주고 남한에 민주주의 국가를 세우는 길이 있었다. 어떤 경우에도 분단을 거부한 민족주의자는 ‘공산화의 위험을 감수한 통일국가’를 선택했지만 철저한 반공주의자들은 차라리 ‘분단된 민주주의 국가’를 선택했다. 그 대표자가 바로 이승만이었다.
광복이후 이승만이 탁월한 수단을 발휘해 대통령이 되었을때 독재, 부패, 부정선거를 저지르고 수많은 시민을 살상했지만 그는 분단국가를 세움으로써 한반도 전체의 공산화를 확실하게 막았다. 그러나 자발적으로 또는 어쩔수 없이 일제에 협력하며 살았던 군인, 경찰, 판검사, 교사, 공무원들이 그대로 남아 대한민국의 권력기관과 행정조직을 장악했다. 일본군 장교는 국군 장교가 되었고 조선총독부를 위해 일했던 특고형사는 경찰 간부가 되었으며 판사, 검사, 공무원, 교사, 지식인, 경제인도 모두 독립국가의 지배층이 되어 예전보다 더 큰소리치며 살게 되었다.
이승만은 독립운동가를 추적하고 체포하고 고문한 일제강점기 조선인 특고형사의 대표선수였던 ‘노덕술’을 구하려고 국회를 짓밟았다. 그로인해 친일 반민족행위자를 처단함으로써 민족사의 정통성을 세우려 했던 ‘국회 반민특위’는 친일파의 역습에 해산당하는 비운을 맞았다. 민주주의와 법치주의가 있어야 할 자리를 독재와 반칙, 부정부패가 점령해버렸고 헌법은 그저 이념으로만 존재할뿐 현실을 지배하지 못했다.
친일파와 빈민특위
대한민국 제헌국회는 1948년 9월 반민족행위처벌법(반민법)을 제정하고 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와 특별경찰, 특별검찰, 특별재판소를 설치했다. 동기가 어떠했든 상관없이 682명을 조사해 559명을 특별검찰에 송치했다. 특별검찰이 그중 일부를 기소하자 특별재판소가 열랐다. 그런데 이승만 대통령이 국회가 헌법의 삼권분립 정신을 해친다면서 반민특위활동을 방해하기 시작했다.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은 반민특위 해체 음모를 꾸미다가 실패하자 반민특위법 제정과 특위활동에 앞장선 젊은 국회의원들을 간첩으로 몰아 구속했다. 소위 ‘국회 프락치’ 사건이다. 이때 이문원, 최태규, 이구수, 황윤호, 노일환, 서용길, 김약수 등 구속된 의원들의 다수가 반민특위에서 활동했었으며, 아이러니하게도 반민특위에서 친일파로 지목된 전봉덕 헌병 사령관, 김정채 헌병 사령부 수사 정보과장, 서울지검 검사 오제도, 서울시경 국장 김태선, 서울시경 사찰 과장 최운하 등이 중심이 되어 이 사건을 수사했다. 이 사건을 전후하여 반민특위와 친일 세력 간 대립이 심화되어 이후 반민특위 활동이 위축되었다. 국회는 1951년 반민법을 폐지했고 처벌받은 사람은 단 하나도 없었다.
친일파를 처단하고 친일 잔재를 청산하지 못한것은 두고두고 대한민국의 약점이 되었다. 북한 집권세력은 김일성을 중심으로 “공산주의자들이 엄청난 항일무장투쟁을 해서 자기 힘으로 조국을 해방했다”고 말하는 동시에 “남한의 집권세력은 친일행위자들이고, 이들이 장악한 국가다”라는 식으로 자기네의 체제 우월성을 선전했다. 그리고 “남조선은 이제 ‘일제 식민지’에서 ‘미제 식민지’로 바뀌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도덕적 우월감은 ‘남조선을 해방’하고 조국을 통일하기 위해서라면 동족상잔의 전쟁을 벌이는 것도 정당하다는 인식으로 이어졌다.
남한의 민족주의자들은 친일파를 청산하지 못한채 미국에 종속되어 살고 있다는 열등감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1980년대 대한민국 사회 한복판에서 ‘주사파’가 탄생한 배경에는 바로 이 뿌리 깊은 ‘민족주의적 열등감’이 놓여 있었다. 친일파 청산 문제는 반민특위 해산 이후 65년이 지나도록 해결되지 않았다. 이승만 대통령 덕분에 처벌을 모면한 친일반민족행위 용의자들은 대부분 천수를 누린 다음 자연사의 축복을 받았다. 결국 친일행위자에 대한 ‘응징’은 전혀 이뤄지지 않은것이다.
미완의 4·19 혁명
민주주의 국가라면 헌법과 법률에 의거해 권력을 행사해야 하지만 이승만은 80이 넘어서도 또 다시 대통령 선거에 나서기 위해 대통령 3선 금지조항을 없애는 부정반칙, ‘사사오입’ 개헌을 실행한다. 그리고 자유당 이기붕 후보와 민주당 장면 후보가 맞붙은 부통령 선거에서 오늘의 선거문화로는 상상조차 할수 없는 투개표 조작을 감행, 3·15선거는 완전한 조작선거가 되었다. 정치깡패를 동원했고 금품으로 유권자를 매수했다. 야당 투표 참관인을 내쫓고 내무부장관 최인규는 긴급지시를 내려 이기붕 특표율을 79%로 조정했다.
민주당은 3·15 선거를 국민주권을 강도질한 부정선거로 규정하고 원천무효를 선언했다. 곳곳에서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특히 경상남도 마산 시위가 격렬했다. 그런데 이날 시위에 나갔던 고등학생 김주열 군이 행방불명되었다. 27일이 지난 4월 11일, 그는 마산 중앙부두 앞바다에 시신으로 떠 올랐다. 로켓 모양의 최루탄이 눈에서 뒷머리를 관통한 채 그대로 있었다. 격분한 시민들은 부정선거와 인권유린을 규탄, 시위가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그런데 정부는 이 시위를 ‘공산당 조직이 조종한 폭동’이라고 비난했다.
4월 19일 아침 이승만 대통령 관저 경무대와 서대문 이기붕의 집 앞에 중학생과 초등학생을 포함해 수만명의 시민이 모였다. 시위대는 대통령 면담과 김주열 사건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며 경무대 정문을 밀고 들어가려 했다. 서대문 이기붕 집의 상황도 비슷했다. 경찰이 총을 쐈다. 두곳에서 21명이 죽고 172명이 총상을 입었다. 이렇게 되자 시위는 단순한 부정선거 규탄을 넘어 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정치혁명으로 치달았다. 오후 3시 정부가 계엄령을 선포했지만 시민들은 경찰 총기를 빼앗아 곳곳에서 총격전을 벌였다. 그런데 계엄사랑관 송요찬 장군이 군의 선제발포를 공개적으로 금지, 이승만 정권을 지켜줄 의사가 없다는 뜻을 밝혔다.
성공한 쿠데타 5·16
자연이 진공을 허락하지 않는것처럼 사회는 권력의 공백을 허용하지 않는다. 1961년 5월 16일 제2군사령부 부사령관인 박정희 소장이 3,500여명의 무장병력을 이끌고 한강을 건너 서울에 들어와 정부청사와 언론기관 등 주요 시설을 점령, 1)민생고 해결, 2)병영복귀 2가지 혁명공약을 명분으로 쿠데타를 성공시켰다.
그런데 당시 미국 대사관, 미8군은 쿠데타 정보를 사전에 입수하고 있었으며, 이에 대하여 윤보선 대통령과 장면 총리는 여러차례 정보 보고를 받았다. 하지만 그들은 미군이 있으니 쿠데타를 할수 없을것이라면서 아무런 조처를 취하지 않았고 쿠데타가 일어난 후에는 마치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행동했다. 장면 총리는 내각과 함께 사퇴해버렸고 윤보선 대통령은 병력을 동원해 쿠데타군을 진압하자는 맥그루더 미8군 사령관의 강력한 제안을 거절했다. 그로써 군사혁명위원회는 국회와 지방의회, 정당과 사회단체를 모두 해산하고 정치활동을 일절 금지했다.
박정희 소장은 군사혁명위원회를 군사재건최고회의로 바꾸고 군부의 반대파를 차례차례 제거했다. 중앙정보부를 만들어 정보공작정치 태세를 갖추었으며 국회에서 자신을 보위할 민주공화당을 창당한 다음 헌법을 바꿔 의워내각제를 폐지하고 대통령중심제를 도입했다. 그 다음 병영으로 복귀한다는 혁명공약 제6조를 폐기하고 1963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제5대 대통령이 되었다. 당시 득표율수는 1.5% 차이에 지나지 않았지만 1967년 제6대 대통령 선거에서도 윤보선을 꺾고 재선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승만의 독재와 장기집권 경로를 그대로 따라 걸었다. 헌법의 대통령 3선 금지 조항을 폐지하고 1971년 금권·관권을 동원한 부정선거로 제7대 대통령이 되었다. 1972년 10월에는 대통령 긴급조치를 9번이나 발동해 야당과 비판세력을 목졸랐으며 야당 지도자 김대중을 납치해 죽이려 했다. 그리고 자신의 추종자들만 체육관에 모아놓고 혼자 출마해 100% 찬성으로 제8대와 제9대 대통령이 되었다.
5·16은 단순히 제2공화국을 무너뜨린 것이 아니라 4·19가 만든 모든것을 파괴해버렸다. 그리고 가난한 농업국가 대한민국에는 기술적 효율성과 합법적 폭력을 보유한 군대조직의 압도적인 힘에 맞설 만한 사회집단이 없었다. 다만, 박정희 대통령은 폭력으로 권력을 탈취했지만 폭력으로만 통치하지는 않았다. 자발적으로 추종하거나 지지한 국민도 많았다. 18년의 집권기간에 박정희 정부는 농업 중심의 전통사회를 중화학공업을 보유한 산업사회로 만들었다. 고속도로와 항만, 비행장을 비롯한 사회간접자본을 건설했고 헐벗은 민둥산을 숲으로 바꾸었다.
로스토는 산업혁명 전후 영국의 경제통계를 분석해 특정한 경제성장의 패턴을 찾아낸뒤 그리고 이것이 영국뿐만 아니라 모든 국민경제의 성장을 설명할수 있는 보편적 패턴이라고 확신했다. 그리고 로스토는 어떤 나라든 적절한 정책을 쓰면 경제발전을 이룰수 있다고 말했다.
로스토는 마르크스와 달리 경제를 움직이고 사회를 변화시키는것이 계급투쟁이 아니라 인간의 보편적 욕망이라고 주장했다. 후진국, 저개발국 또는 개발도상국의 정치적 야심가들에게 로스토의 이론은 위대한 복음이었다. 어느 나라든 이륙을 위한 선행조건을 갖추기만 하면 반드시 하늘을 날수 있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론은 어디까지나 이론일뿐, 어떤 이론도 현실의 성공을 보장해주진 않는다. 로스토의 길을 따른 신생국가들 역시 모두 성공한것은 아니었다. 현실은 이론보다 훨씬 더 복잡하다.
박정희 대통령은 로스토의 문하생이었지만 맹목적인 추종자는 아니었다. 그는 시장과 자유경쟁이 이륙의 선행조건을 만들어줄것이라고 믿지 않았기에 민주적 정부라면 결코 선택할수 없었을 방식으로 이 과제에 도전했다. 그는 이미 일본이 메이지 유신을 통해 모든 권력을 중앙정부에 집중했고, 그 힘으로 유럽을 따라잡는 산업화에 성공했다는 사례를 알고 있었다. 히틀러의 나치당 독재도 궁극적으로 침략전쟁 패배로 체제붕괴했지만 전시 계획경제를 실행함으로써 고속도로를 건설하고 중화학공업, 군수산업을 집중 육성할수 있었다.
박정희 시대 한국경제는 영국, 프랑스, 미국 등 자본주의 선진국과 제국주의 일본, 히틀러의 독일, 스탈린의 소련을 조금씩 빼닮은 체제였다. 다시 말해서 사유재산을 인정하는 자본주의 기본질서에 중앙통제식 계획경제를 결합한 혼합형 경제체제였던것이다. 오늘날 중국의 경제체제도 그와 비슷하다. 중국공산당의 경제관료들이 한국경제 발전과정을 면밀히 연구한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국가주도 경제개발계획의 실마리를 처음 제공한것은 UN이었다. 그들은 식민지배, 6·25 전쟁 분단을 거친 불행한 신생국의 재건을 돕기 위해 ‘한국재건단’이라는 조직을 만들었고 이승만 정부의 경제정책 담당자들이 이것을 참고해 ‘경제개발 7개년 계획’을 만들었다. 그런데 이승만 대통령은 계획경제가 공산당이나 하는짓이라고 생각한탓에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경제개발 7개년 계획’은 한동안 허공을 떠돌다가 4·19 혁명 나흘 전에야 겨우 국무회의를 통과했다. 장면 정부는 1961년 2월 ‘경제개발 7개년 계획’을 수정하여 → ‘5개년 계획 수립요강’을 발표했으나 5·16 쿠데타로 인해 그 계획은 군사정부의 손에 넘어갔다.